감정의 소용돌이

우리는 같은 알파벳을 갖고 있어. 그렇다고 날 사랑하는 걸 두려워하지는 마. 그건 내가 널 사랑하는 수천 가지 이유들 중 하나야

평생을 파도를 두려워하며 살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파도 없이 나타난 바다는 공포 그 자체였다.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파도를 무서워한 게 아니다. 나는 파도를 사랑했다. 파도에 잠식될까 봐 무서웠던 게 아니다. 파도의 입 속으로 몸을 내던질 내가, 빠져나올 생각조차 못 할 내가, 스스로를 질식시켜 죽여버리려는 내가 무서웠던 거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 20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기분 좋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 속에는 어떠한 짜증도 없다 짧디 짧은 이 봄날 바람이 불어야만 날리는 눈이 있다 공기의 요정들이 이동하면 뒤늦게 그들을 따라가는 봄의 눈들이다 갑자기 훅 바람이 불어올 때 눈앞에 펼쳐진 봄눈들의 향연은 얼마나 장관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가...

뜨거운 열기에 팝콘이 터지듯 따뜻한 날씨에 꽃이 개화하듯 작은 옥수수알이었을 때부터 여린 꽃봉오리였을 때부터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은 그때부터 이미 달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못 참고 펑 피어나버린 거지

부딪치는 것과 부딪히는 것 작용과 반작용 한 글자만 다른 거 같은데 왜 한 쪽만 이리도 아플까 우리 둘 사이에는 같은 크기의 힘이 작용하는데 왜 항상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기만 할까 우리는 그 상처를 견디지 못하는 쪽은 왜 언제나 나일까

'달'이 들어가는 단어는 예쁘다 그 단어로 만든 문장 역시 예쁘다 달뜬 내 마음 달콤한 솜사탕 달막달막 숨을 내쉬며 주머니 속 구슬들의 달그락 소리 달이 들어가는 단어들은 원래 이렇게 다 예쁜 건가 그게 아니라면 달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 예쁘게 보는 건가

팔레트는 무서울 정도로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팔레트 위의 물감들은 자신들만의 온갖 끼를 발산한다 눈송이 같은 손은 긴장한 듯 설렌 듯 주춤거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붓을 든다 생각보다 붓이 무거운지 비틀거리지만 황홀하면서도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도화지를 칠해나간다 즐거움도 잠시 팔레트에서 본 물감의 색깔이 도화지에서 보이지 않는다 작고 하얀 손은 당황한 듯...

숨기기에는 내가 아직 많이 어린가보다

마음 속에 아픔을 갖고 있으면 어떻게든 티가 나더라. 눈물이 나오길래 닦았더니 눈은 빨개졌고, 흐느끼는 소리가 나오길래 입을 막았더니 어깨가 들썩거렸다. 눈물 한 방울만 흘리고, 딱 그 정도로만 힘들어하고, 툴툴 털고 일어나고 싶었는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해서 나조차도 아픔을 잊도록. 허나 눈물과 흐느낌이 닿은 얼굴은 점점 콘크리트처럼 굳어갔다. 마음 ...

자동차 가득한 마을 입구에서 매연이 아닌 풀내음을 느낀 순간 하루종일 내리다가 까만 밤이 돼서야 겨우 그친 장맛비에 젖은 풀들은 하루종일 고개를 숙이다가 까만 밤이 되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풀들과 함께 고개를 드는 풀냄새를 우연히 맡은 순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죽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따뜻한 깊은 바다 속에 빠지고 싶다 따뜻한 우주에서 표류하고 싶다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 그냥 잠시동안만 바다 아래에 굴러다니는 무수한 모래알처럼 우주에 떠다니는 수많은 먼지처럼 아무 감정도 소모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만지고 싶지 않다 그냥 잠시동안만

열린 창문의 작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우렁찬 매미들의 소리로 가득찬 날들이 지나고 시원한 늦여름 창문을 힘껏 열어도 들리는 밤의 소리는 풀벌레소리와 단 한 마리의 구슬픈 매미의 소리였다 무더위가 휩쓸었을 때 언제 그칠까 왜이리 길까 투덜거리게 했던 매미소리 한 마리의 울음을 듣고 깨달았다 참 힘이 없구나 참 짧구나 참

반대로 가는게 틀린게 아닐 지도 몰라 주위 사람들이 너와 다르게 간다고 두려워하지마